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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이슈 이야기/미국의 이야기

케네디 암살 50주기, 존 F 케네디 프로필

 

20131120 / 미국이야기 / 케네디 암살 50주기, 존 F 케네디 프로필은?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43세),

미국 역사상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지만,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Dallas)에서 임기 1,037일만에 암살되었고,

 

2013년 11월 22일은 케네디 암살 5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은,

1917년 5월 29일 출생으로 하버드대 정치학을 전공했고,

 

아버지를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전야의 유럽을 시찰하면서

졸업 논문으로, 영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Why England Slept)를 작성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진주만 기습 뒤 해군 장교로 지원한 후,

그가 승선한 어뢰정이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되기도 했지만,

부하들을 구출한 사례가 언론에 알려지며 전쟁 영웅이 되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전쟁이 끝난 뒤, 통신사 기자를 거쳐,

1946년, 29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고,

1952년에는 같은 지역에서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며,

 

1953년에는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였던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와 결혼했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후유증으로 입원해 요양하던 중,

양심의 문제로 여론에 도전한 위대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을 다룬

용기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을 저술해 1957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1958년 상원 의원으로 재선되며,

1960년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후보자로 선거에 나선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New Frontier)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선거 운동을 펼쳤고,

 

아일랜드계 이민자로서 소수파였던 가톨릭 신자라는 이미지는,

가톨릭을 대표해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며, 정교분리라는 소신을 공언해,

종교문제가 쟁점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원천 봉쇄했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네 차례의 TV토론에서

우위가 점쳐지던 공화당 후보이자 전직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상대로,

 

화면을 잘 받는 메이크업으로 젋음과 파워를 강조하고,

자신감있는 목소리와 자세로 유권자들의 호감을 얻어 상승세를 이어가며,

 

최종 투표에서,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303표 대 219표로, 84표를 앞서긴 했지만,

일반 투표에서는, 접전 끝에 11만 2,827표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둬,

TV토론의 중요성에 대한 대표 사례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1월에 있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보라는 명연설을 남기기도 했고,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맞서던 당시 정황상, 외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에,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방미를 요청하고, 양국이 당면한 사항을 토의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적 토대 구축과

장기경제개발 촉진을 위한 경제원조 및 협력을 계속한다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경제지원이 강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듯이, 케네디 가계정치 명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고,

왕실이 없는 미국에서 로열 패밀리로 여겨지고 있는데,

 

아일랜드 출신의 케네디가는

1849년,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가 아일랜드의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와 이민 1세대 생활을 시작했고,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세프 패트릭 케네디(Joseph Patrick Kennedy)가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약용주로써 스카치 위스키를 수입해 막대한 부를 쌓아,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서,

다수의 상원ㆍ하원의원을 배출한 케네디 가문의 기틀을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정치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1932년, 대통령 후보자로 선거에 나서자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했고,

 

그 보답으로 1937년 영국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당시 유럽에서 대두되던 파시즘에 대한 정보를 본국에 보내지 못해 신임을 잃어

정치인으로 거듭나려던 꿈이 좌절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이후, 자신의 아들들에게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인,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지며,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형인 조지프 패트릭 주니어가 사망하게 되자,

형의 뒤를 이어(!) , 캐네디 대통령이 아버지의 집중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아,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저격범이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고,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24세의 리 하비 오즈월드는

체포 후 이틀 뒤인 11월 24일, 댈러스 내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경영자였던 잭 루비의 총에 맞아 숨졌고,

 

이 후,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에서

오즈월드는 국내 또는 해외의 음모와 연계되어 있지 않고,

유명인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발생한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자백이 있기 전, 오즈월드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으면서,

암살 배후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며, 음모론은 지금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존 F 케네디 대통령

현재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케네디 묘지에 잠들어 있지만,

여전히 케네디 신화는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딸캐롤라인 케네디(Caroline Kennedy)가

신임 주일 미국대사로 부임되면서, 케네디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케네디가는 미국의 로열 패밀리로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지속하게 될 지,

계속해서 관심있게 지켜볼 대목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