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이슈 이야기/경제 용어정리

검은 수요일이란(Black Wednesday)?

 

20121127 / 경제용어 / 검은 수요일이란(Black Wednesday)?

 

간간히, 증시 폭락이 있는 날이면

검은 O요일과 같은 용어가 각종 보도의 전면에 등장하곤 합니다~!

 

장밋빛 전망만 가득할 것 같은 증시에,

암흑처럼 어둠이 드리워진다는 뜻에서 이름붙여진 것이겠지만,

사실, 이는 1992년 발생한 검은 수요일 사건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검은 수요일이란(Black Wednesday), 간략히, 1992년 9월 16일 수요일,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 및 다른 헤지펀드가 영국 파운드화를 투매하며 환투기에 나선 후,

이를 방어하던 영국 정부가 버티지 못하고,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을 탈퇴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영국은 1990년 10월 8일에,

단일 통화권을 구축하려는 유로존을 형성하기 전, 각국의 환율 메커니즘 점검 차원에서 만들어진,

준 고정환율제라고 할 수 있는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하게되는데,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따르면, 가입국의 화폐, 즉 영국 파운드화의 경우,

협약에 따라서 독일 마르크화의 +, - 6% 수준의 변동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고,

만약, 변동폭이 이보다 커지게 될 경우, 중앙은행이 개입해 변동폭을 맞춰야 했지만,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어있었던 독일이 통일되면서,

독일 정부는 낙후된 동독 경제를 단기간에 활성화시키기위해서

동독 화폐와 서독 화폐를 1 : 1로 맞교환하는 등 마르크화를 천문학적으로 풀게되고,

 

따라서 독일 중앙은행은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금리를 인상하는 초고금리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독일의 초고금리정책으로

당시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연간 2.5%안팎으로 조정되며 독일의 사정은 점차 나아졌지만,

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됨으로써, 시중의 자금이 마르크화로 쏠리며 고평가되자,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 가입한 국가들 또한, 협약에 정해진, +, - 6%라는 변동폭을 유지하기위해서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다른 국가들의 실업률 증가와 불황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92년 9월 8일에는 가장 먼저 핀란드가 독일 마르크화와의 연동제를 폐기하는 등

각국의 반발이 있었지만, 당시 독일과 함게 유럽연합의 주도권을 다투던 영국은,

 

영란은행의 금고는 넉넉하며,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는 영국의 장래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약속을 이행하고, 환율 하락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하게 되고,

환율 방어를 위해서 당시 보유하던 외환의 많은 양을 소모하고도,

헤지펀드의 무차별 공세(!)에 백기투항하게 된 사건입니다~!

 

 

당시 영국의 사정이 다소 흥미로운데,

검은 수요일이 발생하기 전, 1980년대 말 집권당인 보수당의 마거렛 대처 총리는

파운드화를 유럽의 다른 통화와 연계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켈 로슨은 파운드화를 유럽통화와 연동시켜야한다는 것이 소신이었고,

 

이로써, 공개적으로 서로 논쟁을 벌여 1989년 10월 로슨 재무장관이 사임한 후,

훗날 보수당의 총리가 된 존 메이저가 재무장관 직을 이어받게되는데,

 

대처가 총애하고있던 존 메이어는 차기 총리를 염두에 두고,

대처와 대립각을 세우며 ERM 가입을 압박하게 되었고,

 

지지도가 점차 떨어지던 대처는,

고금리로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금리 인하가 절실히 필요하던 상황에서,

메이저 재무장관이 ERM 가입을 약속하면 금리를 인하하겠다고 제안하자,

결국, 대처는 ERM 가입에 승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영국의 ERM 가입

경제적인 분석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결국 ERM에 대한 제대로된 분석과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이뤄지게 되었고,

 

1992년 4월, ERM 가입을 주도한 메이저가

총선에서 총리가 된 후, 헤지펀드의 파운드화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파운드화 사수가 주된 목표가 되어, 더욱 과도한 시장개입이 이뤄지게된 것입니다~!

 

 

검은 수요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지 소로스인데,

1992년 9월 15일, 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되었다는 발언을 기점으로,

파운드화는 환 투기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특히, 조지 소로스가 100억달러를 동원 혹은 베팅(!)해서

영국의 파운드화 투매를 시작하고, 방송 등에 출연해 연일 파운드화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고,

 

다른 헤지펀드들도 가세해 1천 100억달러가 파운드화를 공격하자,

파운드화 환율은 하한선까지 떨어지게되고,

 

환율 방어를 위해서 영국 중앙은행이 투매한 파운드화를 사들이며 방어에 나섰고,

하루에 두 차례나 단기 이자율을 올리는 비상조치로 사태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율 하락이 지속되자, 빗발치는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가 이어지면서,

결국, 영국은 1992년 9월 16일자로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탈퇴를 선언하게된 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지 소로스는 엄청난 수익을 거두게 되면서,

단숨에 헤지펀드계의 유명 인사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ㅎ

 

 

검은 수요일을 통해서,

영국 중앙은행이 환투기 세력에 굴복했다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헤지펀드의 영향력이 이슈화되었고,

 

인위적인 환율관리시스템인 ERM의 한계가 결정적으로 대두되었지만,

결국, 정치적 타협에 의해 유로존이 형성되고, 유로존은 지금 또 다시 위기에 처한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고,

 

영국은 검은 수요일 이후, 정치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중앙은행에 금리결정권을 주어, 독립적인 금리 결정이 이뤄지도록 조치했고,

단일통화인 유로존 가입에 거리를 두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고,

지금도 유로존에 미가입한 국가로 남아있게 되는데,

 

검은 수요일은,

정치와 경제 사이의 영향과 상관관계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