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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슈 이야기

구리 9단과의 10번기 대결에서 승리한 이세돌 9단 프로필은?

 

20140928 / 구리 9단과의 10번기 대결에서 승리한 바둑기사 이세돌 9단 프로필은?

 

한중 바둑기사의 자존심 대결로도 불렸던

우리나라의 이세돌 9단과 중국의 구리 9단의 맞대결인 10번기 대결에서

 

우리나라의 이세돌 9단이 10번기 8국만에 6승을 기록하며 승리했습니다.

(1, 2, 5, 6, 7, 8국 이세돌 승 / 3, 4국 구리 승)

 

 

중국의 헝캉가구회사가 후원해 2014년 1월 26일 중국 베이징에서 막을 올린 10번기 대결

한 선수가 6승 이상 승리 할 경우 상금 500만 위안(한화 약 8억 5천만원)을 독식하고,

패자는 여비조로 20만 위안(한화 약 3,400만원)만 가지는 승자독식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

 

한중 바둑 최강자들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점,

83년생 만 31세 동갑내기간의 맞대결이라는 점,

2004년 이후 상대전적이 21승 1무 21패를 기록중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끌었고,

 

이세돌 9단이 8월 31일 열린 10번기 7국에서 승리하며 총 전적에서 5승 2패로 앞서며

2014년 9월 28일, 구리 9단의 고향인 중국 충징에서 치러지는 10번기 8국에서

최종 승패가 결정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왔습니다.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10번기 대결에서 승리한 이세돌 기사

1983년 3월 2일 전라남도 비금도 출생으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셋째 아들이라서 붙여졌을 수도 있지만(!),

돌(乭)로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초등학교 교사이자 아마 5단 바둑 실력을 가진 아버지 이수오씨에게

5살 때 처음으로 바둑을 배운 것으로 전해지며,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금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바둑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자 바둑에 전념하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했고,

 

서울로 상경해 프로 조련사로 유명한 권갑용 문하에 입문해

1996년 역대 최연소 5위 기록으로 프로가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세돌 9단은 프로 입단 초기에 정규승단대회를 통해 1999년에 3단으로 승단한 후,

대국료도 없이 연간 10판씩 소화해야 하는 기존의 승단대회가

제대로 된 바둑 실력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오랫동안 3단에 머물며

다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바둑계에 일대 파란이 일기도 했고,

 

2003년에는 이른바 이세돌 특별법이라는 개정된 승단제도를 이끌어내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도전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세돌 9단은 무덤덤한 모습으로 돌부처라는 평가를 받는 이창호 바둑과는 달리,

압도적인 수읽기를 바탕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흔들기로 상대를 혼란시키고

강한 전투력으로 상대를 압살하는 모습을 보이며 강한 개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데,

 

2000년 치러진 제5기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첫 우승을 거두고,

같은해 배달왕기전에서 당대 최고로 칭송받던 유창혁 9단을 누르며 2관왕에 오르고

 

3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불패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입단 5년만에 최우수기사상(MVP)를 받기도 했고,

 

2001년 열린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올라

이창호 9단을 2-0까지 몰아붙였다가 내리 3판을 지며 역전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3단으로 세계대회 첫 우승에 도전해 화제가 되기도 했고,

 

2002년에 치러진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는

유창혁 9단을 누르고 세계대회 첫 우승을 달성하고,

 

2003년 7월 7일 치러진 후지쓰배에서 승리하며

사상 최연소 9단 승단(20세 4개월), 입단 후 최단기간 9단 달성(8년째)라는 기록을 동시에 수립해

 

이창호 9단이 가지고 있던 9단 승단 20세 11개월,

입단 후 최단기간 9단 달성 (9년 11개월)의 기존 기록을 넘어서며 화제가 되었고,

비금도 바둑 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2003년 치러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 9단과 재격돌해 3 대 1로 우승하며,

바둑계에 이창호 시대에 이어 이세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습니다.

 

 

이세돌 9단은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선전하다가

2009년에는 상위랭커에게 불리한 대진방식이라며 한국리그 대회불참을 선언해

고향 출신 바둑 스타를 보고 팀을 창설한 신안군과 바둑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고,

 

프로기사총회에서 징계를 결의하자 동료 기사들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며

2009년 6월 30일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 18개월간의 휴직계를 제출하고 잠적해

바둑계 초유의 1인자 휴직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구리 9단 등을 앞세워 중국이 세계 바둑계를 장악하기 시작하자

한국기원이 2010년 1월 11일 소속기사 내규의 준수 등을 복직 조건으로 제시했고,

 

BC카드에서도 본선시드를 주며 대회참가를 설득하자

이세돌 9단은 한국기원을 방문해 합의안에 서명하며 6개월만에 휴직을 끝내기도 해

저돌적인 성격과 강한 자신감, 근성을 보여주며 풍운아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최근 바둑계의 주도권이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려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의 후원으로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10번기 맞대결이 개최되고,

 

이는 양국 바둑 자존심이자 상징으로 평가되는 두 기사를 내세워

중국이 완벽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세돌 9단이 중국의 구리 9단을 누르고 이름값을 하고,

돌로서 세상을 정복하며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일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며,

 

이세돌 9단의 활약을 발판삼아 우리나라 바둑 기사들이 더욱 선전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승승장구 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